요즘 난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꾼다.
벚꽃엔딩
W.다묘
03.
BGM / 에릭남 - 오래 전 안녕
아이의 집은 학교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종이가 가리키는 주소를 찾아간 나는 그곳에 있는 집을 보곤 어린 마음에 놀랐었다. 그도 그럴것이 아이가 살고 있다는 집은 커다란 이층집이었으니까. 엄청나게 거대한. 한참을 멍하니 그 집만을 올려다보던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곤 대문으로 다가가 벨을 눌렀었다. 하지만 집 안에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몇 번을 다시 눌러봐도 마찬가지였기에, 혹시 벨이 고장난 건 아닌가 싶어 대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리려던 순간이었다. 대문은 어이없게도 내가 살짝 손을 대자마자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때의 난, 열린 대문을 보며, 이렇게 들어가도 괜찮은걸까 한참 망설였다. 그러다가 이 집 어딘가에서 끙끙대며 앓고 있을 아이가 생각나 결국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넣었다.
난,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었다.
넓은 집 안에는 사람의 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1층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던 나는 이 곳엔 정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차가운 냉기가 서려있던 1층과 달리 2층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조금씩이나마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난 점차 걸음을 빨리 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계단을 다 오르자 보이던 적지 않은 개수의 문들에 잠시 고민을 해야했다. 어디로 가야 아이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그러다가 결국 문들을 하나하나 조금씩 열어보기로 하고 천천히 가까운 문부터 열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덧 내 손길이 닿지 않은 문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이는 이 집 안 아무 곳에도 없었으니 분명 여기 있을거라는 생각에, 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오랜만에 보는 아이가, 아픈 아이가 문을 벌컥 열어버린다면 놀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주 천천히, 조금씩. 이윽고 내가 방 안을 볼 수 있을만큼의 틈이 생겨났고, 내 시선은 당연스레 그 곳을 향했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어떤 남자도 같이. 난 직감적으로 그 남자가 내 머릿속에 새카만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는 그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내 여린 아이를 짓누르고 있었다. 탄탄하고 구릿빛인 그의 몸 아래에서, 아이는 제 하얀 몸을 완전히 드러낸 채, 그의 몸짓에 따라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침대 위로 펼쳐진 얄쌍한 팔이, 그의 겨드랑이에 끼워진 덜 자란 다리가, 남자를 받아들일 때마다 허공에서 바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봐버린 난 입이 붙어버린 것 마냥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거칠게 아이를 탐하고 있는, 남자를 멍하니 응시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허공을 휘젓던 아이의 팔이 다시 축 늘어질 즈음이었을까, 남자의 검은 시선이 나를 향했었다. 놀란 듯 잠시 눈을 크게 떴던 남자는 금새 눈을 가늘게 뜨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전히 자신의 눈을 나에게 고정한 채. 이승현, 말해. 낮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워냈다고 느낄 즈음, 조그만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흑, TOP, 사, 윽, 사랑해요."
사랑해, 날 사랑해줘요. 날 버리지마. 아이는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그렇게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었다. 애처로운 아이의 목소리에선 절박함마저 느껴졌다. 문을 등지고 있는 아이이기에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 얼굴도 역시나 절박하리라. 여전히 그의 움직임에 정처없이 흔들리며, 아이는 축 늘어졌던 팔로 남자의 단단한 목을 끌어안으며 바들거렸다. 남자는 그런 행동에 상이라도 주는 듯 고개를 숙여 아이의 입에 제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눈동자만큼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칠흑같은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을 때, 난 등을 돌려 도망쳤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소중히 들고 있던 가정 통신문과 약봉투가 떨어져 계단 위를 뒹굴었지만 그럼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우월감에 찼던 남자의 눈동자가, 여전히 내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아, 쉼없이 뛰어 커다란 집을 벗어났고, 길거리를 지나쳤다. 눈 앞에 학교가 보이고 나서야 난 끝없을 거 같았던 뜀박질을 멈추곤 주저앉아 버렸다. 거칠어졌던 숨이 서서히 제 상태로 돌아갈 때쯤, 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처음엔 조용히 흘러내리던 눈물은 차츰 격렬해져 결국 난 소리내어 크게 울어버렸다. 여전히 머릿속에 박혀있는 아이와 남자의 모습이, 깊게 잠긴 채 남자를 갈구하던 아이의 목소리가, 어린 날 그리도 서럽게 만들었다.
그것이 아이에 대한 내 기억의 끝이다. 아니, 아니다. 아직 마지막 기억이 하나 남아있다. 그날, 난 집에 돌아와 끙끙 앓기 시작했다. 지독한 열병이었다. 꼭 아이의 아픔을 옮아온 것 같이. 내 온 몸을 휘감아오는 뜨거운 열에 며칠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어느정도 흐르고 나서야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내일이면 학교를 갈 수 있겠다는 엄마의 말에 난 오랜만에 책가방을 꾸렸다. 교과서를 넣고, 공책을 넣고. 마지막으로 필통을 넣으려던 순간이었다.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며 방문을 열었다.
"지용아, 친구 왔어."
"누구요?"
"그건 모르겠네. 그냥 네 친구라고만 하고 이름을 안 말해주던걸. 좀 하얗고, 키가 이만한 아이던데? 들어오라고 해도 안 들어오겠다고 그러더라."
엄마의 말에 난 바로 현관을 향해 뛰어갔다. 하얗고, 나보다 조금 작은 키. 아이임이 분명했다. 앓는 도중에도 눈 앞에 아른거리던 아이가 왔다는 말에, 난 현관으로 뛰어가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곤, 어딘가 핼쓱해진 아이와 마주할 수 있었다. 아이는 내가 급하게 나타나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힘 없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안녕, 짝꿍. 잔뜩 갈라진 아이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닿아왔다. 하지만 난 아이처럼 인사하지 못했다. 그저 멍한 눈으로, 아이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아이의 눈동자는 너무 솔직하게 아이의 심정을 드러내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애써 태연한 척,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내 손을 잡아 날 집 밖으로 끌어내었다. 할 얘기가 있어. 아이의 그 한마디에 난 아무 말 없이 아이의 걸음을 따랐다. 아이의 걸음이 멎은 곳은 집 앞 놀이터였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그네 두 개를 하나씩 차지했던 나와 아이. 아이는 몇번이고 무언가에 쫓기듯 주변을 둘러보더니 불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부모님이 없어."
그 말을 시작으로 놀이터에는 아이의 목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조근조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여린 목소리. 이야기에는 아이가 겪어왔던 많은 아픔과 슬픔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난 아무런 반응도 보일 수가 없었다. 단지, 아이의 말이 끝날때까지 어린 내가 했던 것은, 그 아슬하던 목소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가며, 발 앞코로 애꿎은 모래흙만 파내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내 행동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듯, 제 이야기를 이었다. 얼마 후, 아이의 목소리가 마침내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에까지 닿고 나서야 아이는 말을 마쳤다. 그리고 한참을 가만히 있던 아이는 아직 할 말이 더 있는 듯 입술을 몇 번 깨물어 보였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후련하고, 위태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 난 떨어지지 않던 입을 애써 떼어내며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아니, 건네었을 것이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이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면.
"지용아,"
"…응?"
"잘, 지내."
그렇게 한 번 더 입술을 달싹인 아이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처음으로 '짝꿍'이라는 호칭이 아닌, 온전한 내 이름을 불러주었던 아이는, 도망치듯 뛰어 내 시야를 벗어났다. 이상하게도 난 아이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저, 발이 땅에 붙은 사람마냥, 여전히 그네에 앉아, 아이의 뒷모습을 응시했던 나. 어딘가 떠나버리는 것처럼 행동했던 아이에게서,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던 나. 그리고, 야속하게도 잘 지내라던 아이의 인사 뒤에 이어졌던, 한 도막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버렸던 어린 나.
그 놀이터에서 홀로 돌아왔던 그 후, 난 정말 아이를 보지 못했다. 시간이 한참 흘러버린 지금 날에 까지도, 내 기억에 남아있는 아이의 마지막 모습은 뛰어가는 조그만 등, 그 뿐이었다.
여름이 채 오기도 전인 6월의 어느 날, 아이는 그렇게 내게서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