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뇽토리]Blossom In U
× '뇽토리 초능력 그룹 합작'에 '두근거려' 로 합작에 참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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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아저씨를 만난 건 무척이나 화창한 봄날이었어요.
*
이번 겨울은 유난히 길었던 탓일까. 4월 중순이 다 된 지금에서야 봄이 서서히 피어났다. 느지감치 기지개를 피며 일어난 봄은 고집 세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겨울의 잔해들을 바쁘게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에 들에도, 산에도 초록빛 싹들이 자라났고, 온갖 꽃망울들이 터트려졌다.
마찬가지로, 승현의 학교에도 봄은 찾아왔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교정의 벚나무들에 봉곳하게 올라왔던 꽃망울들은 어느새 만개해 나름 장관을 이뤄내고 있었다. 이따금씩 바람이 불 때면 눈송이마냥 떨어지는 분홍빛 꽃잎들을 멍하니 보던 승현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꽃구경 가고 싶다."
교정에 몇 없는 벚나무들도 개화하니 저렇게 장관인데 벚꽃놀이 명소로 유명한 곳은 말 다했을 터. 게다가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승현은 딱 학교를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기서 창문으로 뛰어내리면 안 다치고 학교를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위험천만한 상상까지도 한 승현이었지만 이내 제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문제집을 보곤 학교 탈출 욕구를 접어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창문 밖을 눈에 담기 전까지 끙끙대며 풀고 있던 수학 문제를 보니 새삼 자신이 고3이라는 것이 훅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말해봤자 거절 당하겠지. 공부에 묻혀 살 시기에 벚꽃 구경이 왠 말이냐며 잔소리같은 걱정을 잔뜩 해주실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 승현은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기다 요즘 많은 업무 스케쥴에 평소보다 바빠 보이던 모습을 생각하니 더욱 말해 볼까란 생각이 사그라드는 승현이었다. 매년 이 맘때가 되면 프로필 사진이다, 단체 사진이다 뭐다 해서 이 학교 저 학교로 불려 다니곤 했으니까 올해도 말 다했지. 승현의 표정이 어두운 빛을 띄워냈다.
지용과 만난지 어연 삼 년째. 절대 짧지는 않은, 길면 길다 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었다. 그것이 연애 기간이라면 더욱이. 하지만 하루의 3분의 2 이상을 학교에서 보낸다는 고등학생 신분인 승현 탓에 데이트 다운 데이트를 하는 일은 정말 손에 꼽을 수 있었다. 그래도 중학교 땐, 하루가 멀다시피 하며 작업실로 놀러 가고 그랬는데. 승현의 시선이 다시금 연분홍빛 나무로 향했다.
3년 전 처음 만난 날도, 이렇게 벚꽃이 만개한 봄날이었다.
*
"어휴, 오늘따라 담임 엄청 말 많네."
그냥 전달 사항만 간단하게 말하면 될 것이지 무슨 세세히 설명이야. 누가 국어쌤 아니랄까봐. 담임 선생님이 교실 밖으로 나가자 기다렸단 듯이 투덜이는 제 짝 은혜의 목소리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던 승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담임 나갔어?"
"어, 방금. 넌 더 안자니?"
"너 때문에 잠 다 깼네요."
"어머~ 그랬어요? 그거 참 미안하네."
말과는 다르게 표정과 어투에선 전혀 미안함이 배어나오지 않는 은혜였지만, 승현은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담임이 나간 이후로 급격히 소란해진 학급 분위기 탓에 잠귀가 밝은 편인 승현은 어차피 깨어났을 터. 미련 없는 표정으로 아직까진 조금 졸린 눈을 비벼낸 승현은 팔을 뻗어 기지개를 쭉 폈다. 익숙한 듯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혜가 갑자기 씨익 웃었다.
"팬더야."
"너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그럼, 우리 승현이~?"
우웩. 은혜의 낮간지러운 호칭에 승현이 토하는 시늉을 해보이자 은혜가 꺄르르 웃으며 승현의 등을 손바닥으로 팡팡 쳐냈다. 그것 봐, 싫으면서 그래.
"그러니까 팬더."
"…응."
"내가 임무를 내리겠다."
쌤 들어오나 망 좀 봐줘. 아까와는 달리 팬더란 호칭에 순순히 대답을 한 승현이 은혜의 말에 무슨 소리냐는 듯 눈만 깜빡였다. 그런 승현이 얼굴을 읽은 건지 활짝 웃은 은혜가 가방을 제 무릎 위에 올리더니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것은 여자애들이 흔히 들고 다니던 파우치였다. 그것을 깨달은 승현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너 설마 화장하려고 그래? 그 말에 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하지도 않더니."
"오늘 졸업사진 찍잖냐."
"…어?"
"…설마 몰랐니?"
담임이 며칠 전부터 언급 했는데? 하나도 몰랐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얼굴에 가득 띄운 채 몇번이고 되물어 오는 은혜에게 승현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전혀 못 들었어…."
"그러니까 작작 좀 자지 그랬어."
허구한날 잠이나 퍼질러 자니까 중요한 이야기도 못 듣잖아.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어내는 은혜의 행동에 승현은 요 근래의 기억을 천천히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잠결에 사진 촬영이라는 얘기를 들어봤던 것 같기도 하지 싶은데. …그럼 뭐 어때.
"어차피 미리 알아봤자 달라질 건 없었는데, 뭐."
승현 자신이 일류 패션 모델도 아니고, 촬영이라고 해 봤자 교복만 깔끔하게 입고 사진 몇 장만 찍으면 되는 거니 미리 알아도 지금과 별 다른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여전히 잠이나 자고 있었겠지.
그런 자신을 부러움 반, 한심함 반의 표정으로 보고 있는 은혜를 잠시 뒤로하고, 승현은 교실 안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자애들은 단체로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책상 위에 내놓은 거울에 얼굴을 가져다 박다시피 하며 꽃단장을 하고 있었다. 저러다 거울 뚫리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모습은 열정적이었다. 반면에 남자애들은 가만히 앉아….
"이은혜."
"응?"
"지금 문수가 뭐 하는 걸로 보여?"
"문수? 아, BB크림 바르네."
…있는 것이 대다수였지만 일부는 여자애들마냥 제 매무새를 가다듬기 바빴다. 특히 자신의 얼굴에 치덕치덕 크림을 바르는 데 열중으로 보이는 제 친구 문수의 모습에 승현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까 졸업사진 잘 나와야 한다고 말하면서 나한테 빌려갔어."
"아…. 넌 다 했어? 쌤 오기 전에 빨리 끝내야 할 거 아냐."
"아직. …그러니까 망 좀 봐달라니까? 응?!"
나 다 끝내고 시간 남으면 너도 좀 해줄게! 뜬금없는 은혜의 말에 승현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 아니 괜찮아. 난 안 해줘도…. 사실 아까 문수가 크림을 바르는 것이 아니라 올리다시피 하던 모습이 계속 떠올라서 은혜의 호의 아닌 호의가 내키지 않는 승현이었다. 특히 화장품이라면 스킨과 로션밖에 모르는 자신이었기에 그녀가 파우치를 빌려준다 하더라도 잘 할 자신이 없었기도 하였고. 하지만 은혜는 승현의 거절은 들리지도 않는 듯 제 말만 하기 바빴다.
"걱정 마. 직접 해줄테니까 얼굴 하얗게 뜨고 그런 일은 없을거야."
"아니, 난…."
"Trust me, 승현."
제 어깨에 손을 척하니 얹으며 결연한 얼굴로 엄지를 세워드는 은혜의 행동에 승현은 어쩐지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 뭐. 직접 해준다고 하니까 받아서 잘못되는 일은 없겠지, 아마도? 결국은 거절을 포기한 승현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
졸업앨범 사진 촬영이 있는 날이라고 3학년 온 교실들이 소란하였지만 매 시간마다 들어오는 선생님들도 그다지 심한 제지를 하지 않았다. 슬쩍 봐도 화장한 티가 나는 여학생들의 얼굴을 보고서도 오늘 얼굴빛들이 밝아졌네? 라는 등 가벼운 농담을 하며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것이 태반이었고, 늘상 하던대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습을 주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어차피 지금 학생들의 귀에는 수업 내용 따위는 들어갈 리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앞반부터 차례차례 이뤄지던 촬영은 점심 시간이 가까워질 쯤에야 승현의 반인 5반까지 순서가 왔다. 이거 끝나면 점심 시간이다! 라는 생각에 더욱 들떠버린 대부분의 반 아이들은 화단 근처에 모인 채로 왁자하게 떠들고 있었다. 제 순서를 기다리던 승현도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짝인데다가 번호까지 앞뒤인 은혜와 함께 이 왁자함에 한몫 하고 있는 것. 은혜가 제 손길이 닿은(?) 승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뿌듯한 듯 입을 열었다. 잘 됐네.
"내가 그랬잖아, 누나만 믿으라고."
"네가 무슨 누나야? 생일도 한 달 차이밖에 안나면서."
"한 달차이면 내가 너보다 적어도 30일은 더 살았어. 그럼 누나지."
"웃겨, 정말."
"오구구, 우리 승현이 어려서 그런지 피부가 좋더라? 누나가 부러워 죽을 뻔 했어요~"
"…아, 씨. 이은혜!"
정말 어린 아이를 어르는 듯한 은혜의 말투에 승현이 조금은 기분이 상하기라도 한 건지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는 키득거리며 어깨만 가벼이 으쓱여 내었다. 하지만 사실이라고.
아까 전, 제 단장을 마치고 약속대로 승현의 얼굴에 소량의 BB 크림을 발라주던 은혜가 그의 피부 상태에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웬만한 여자애들보다 보들보들한 피부에 승현이 부러우면서도 어쩐지 질투와 비슷한 감정까지도 은혜는 느낄 수 있었다. 축복받은 피부네, 축복받은 피부. 청춘의 심볼이라고 불리워지는 여드름도 종적을 감춰버린, 마치 어린애의 것과 같은 승현의 피부에 나름의 깊은 충격을 받은 은혜인지라 그 이후로 계속 승현을 저런 식으로 놀리고 있었다. 그녀 나름으로선 칭찬이 내포된 장난이었으나, 정작 당하는 입장인 승현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뚱한 얼굴로 어린애 취급 말라면서 버럭댈 뿐이었다. 그 반응이 꽤나 재미있는 구경거리였기에 은혜도 제 순서가 점차 다가옴에도 장난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 이어가려던 참이었다. 아마 누군가가 제 어깨를 턱 붙잡지 않았으면 말이다.
"얘들아, 조용히 좀 할래? 자꾸 떠들면 포토샵으로 눈, 코, 입 다 날려버릴거야."
갑자기 각각 왼쪽 어깨와 오른쪽 어깨를 붙잡힌 승현과 은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목소리가 들려오는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낯선 남자의 얼굴이었다. 청바지에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꽤나 활동적인 옷차림을 한 그는 저를 돌아보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씨익 웃어보였다.
"너희가 자꾸 떠들면 저기 사진 찍는 아저씨가 신경쓰여서 촬영을 못해요. 그러니까 그만 떠들자?"
웃는 얼굴로 협박 아닌 협박을 해오는 남자의 행동과, 어깨 위의 손에서 느껴지는 묘한 압력에 승현과 은혜는 입을 꾹 닫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옳지, 착하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만족한 듯, 남자는 그제서야 아이들의 어깨에 올려두고 있던 손을 치워주었다. 그러자 마법이라도 풀린 것마냥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 차오른 은혜가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오빠는 누구예요? 사진사예요?"
"허이고, 떠들지 말라니까 나랑 얘기하려고?"
저도 조용히 하려고 했는데, 잘생긴 오빠 보니까 궁금한게 많아져서 가만히 있을 수 없더라고요! 능청스런 은혜의 말에 남자의 입가에 가벼운 웃음이 띄워졌다.
"사진사 맞아. 지금은 일 배우는 중이긴 하지만."
"그렇구나, 그럼 오빠가 우리 사진 보정해 줘요?"
"음, 뭐."
"아까 얼굴 다 날려 버린다고 협박 하셨잖아요. 맞죠?"
"하하, 그래. 그게 내 일이야."
아직 카메라 만질 레벨은 못되거든. 은혜를 보며 남자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그는 저를 보며 질문을 쏟아내는 은혜가 그닥 싫지 않은 듯 해보였다. 터울 많은 어린 여동생을 대하는 오빠의 모습 같았달까. 반면 승현은 그런 두 사람을 옆에서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원체 붙임성 좋은 은혜와 달리 승현은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제 차례가 된 은혜가 사진을 찍으러 자리를 뜨자, 그제서야 목석마냥 서 있는 승현에게 관심이 생긴 듯 남자가 승현을 불렀다.
"거기 남학생."
"…네?"
"아까 전까지는 잘도 떠들더니 지금은 통 말이 없네. 질투라도 하니?"
"질투…요?"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어보는 승현을 보며 남자가 뛰어가고 있는 은혜의 뒷모습을 가리켰다. 네 여자 친구 아냐? 그 말에 승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은혜가 내 여자 친구라고?
"아니거든요."
"그래? 난 또, 둘이 엄청 붙어서 떠들기에 그런 줄 알았지."
"쟨 그냥 여자'인' 친구에요."
승현이 부러 '인'을 강조하며 말하자 남자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알았어. 여자'인' 친구. 착각해서 미안하다. 자신처럼 강조해 말하는 남자의 행동에 승현이 아까 은혜에게 놀림 받았을 때마냥 뚱한 표정으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따라해요."
"내가 뭘?"
"방금 내 말투 따라했잖아요."
"그나저나 너 얼굴에 뭐 발랐어?"
승현이 작게 움찔했다. 내가 그렇게 조금만, 살짝 바르라 했건만 보면 확 티날 정도로 발라줬나? …젠장, 이은혜. 사진사 앞 의자에 앉아 한창 촬영중인 은혜를 반쯤 흘겨보는 승현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속이 드러나 있었다. 그 때문에 우스웠던 것일까,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표정 보아하니 맞구나? 거기다 저 여자애가 해준 거고?"
"…티 많이 나요?"
"응? 아니, 별로."
…별로라고? 의아하다는 듯 눈만 꿈뻑이는 승현을 바라보던 남자가 다시금 어깨를 으쓱여냈다.
"그냥, 남자애 치곤 되게 뽀얗고 그래서. 감으로 찔러봤지."
그게 다야.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남자는 제 말을 마치자 이번엔 짧게 픽 웃어보였다. 아까의 재밌다는 티를 팍팍 내는 웃음과는 느낌이 다른 웃음이라고 승현이 생각할 때였다. 승현의 머리 위에 무게감 있고 따뜻한 무언가가 올려졌다. 남자의 손이었다.
"특별히 네 보정은 잘 해줄테니 앞으론 바르지 마."
"……."
"지금부터 그런 거 바르면 안 좋다?"
알았지? 약속이다. 손으로 승현의 머리를 두어번 툭툭 두드려주며 남자가 한 말이었다. 딱히 다정한 어투도 아니었건만 제 머리에 닿은 손 탓일까, 승현은 어쩐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었다. 어, 어째서 이런 기분인거야. 자신의 몸이 반응하는 행동이었지만, 익숙지 않다 못해 낯선 느낌에 승현은 당황을 하고 말았다.
"…아저씨 같은 소리."
"아저씨라니. 나 아직 스물 일곱밖에 안 됐어."
"아, 아저씨죠. 11살 차이면 아저씨 맞지 뭐!"
그래서 였을까, 승현은 평소보다 커진 목소리로 오버스런 반응을 보였었다. 11살 차이는 아저씨! 라고, 그날 처음 본 남자에게 선포 하면서.
*
뭐, 그 이후로 승현은 사진 촬영 차례가 와 버린 탓에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자리를 떠야 했고 제 순서를 마치고 돌아온 후엔 먼저 돌아와 있던 문수가 밥 먹으러 가자며 저를 답싹 잡아 급식실로 향한 탓에 그와 다시 얘기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끝인 줄 알았건만,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어느 샌가 그에게서 얻어 온 연락처를 살랑이던 은혜가 놀러가자! 라고 하며 저를 사진관으로 끌고 가는 바람에 '아저씨'의 인연은 그렇게 지속되었던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자신은 권지용이란 이름이 있다며, 아저씨라고 그만 좀 부르라던 지용과 형이라고 부르기 싫다고 뻗대던 자신이 이런 사이가 될 지는 전혀 몰랐는데. 사람의 일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지 싶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승현이 책상 서랍에서 슬그머니 제 핸드폰을 꺼냈다. 불현듯 떠오른 옛생각(?)에 지용이 보고 싶어져 톡이라도 남겨둘까 싶어서였다. 노란색 아이콘을 꾹 눌러 채팅창에 들어간 승현이 빠른 속도로 자판을 두드렸다. [보고 싶어요♥] 특별히 속이 꽉 찬 하트까지 붙여가며 메세지를 적고선 뿌듯한 마음으로 전송 버튼을 누르니 곧 보내진 메세지 옆에 숫자 1이 따라 붙었다. 메세지 확인을 잘 안하는 지용이기에 이 숫자가 지워지는 건 최소 몇 시간 후일 터. 한참 있다가 다시 꺼내봐야지. 승현이 채팅창을 나오려던 순간이었다. 메세지 옆의 1이 반짝, 사라졌다. 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승현이 액정만 응시하고 있자, 곧 따끈따끈한 지용의 메세지가 대화창에 나타났다.
[공부나 하세요.]
…아저씨 맞네. 혹여 지용 말고 다른 사람이 메세지를 확인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한 승현이었지만 메세지의 내용에 지용이 맞음을 확신했다. 저렇게 철벽치는 것 마냥 답하는 건 우리 아저씨밖에 없지, 아무렴. 그나저나 왜 이리 칼답이래?
[오늘 답이 왜 이렇게 빨라요. 웬일이래?]
[그냥. 싫어?]
[…아니요.]
당연히 싫진 않죠. 오히려 기쁘지. 중얼거리며 지용의 메세지에 대답한 승현이 문득 창 밖을 바라보았다. 벚나무와 교정 곳곳의 바닥에 깔려있는 꽃잎들을 쓸어내는 듯 빗자루를 든 채 바삐 움직이는 수위 아저씨를 눈으로 좇던 그가 다시 액정 보니 새로운 메세지가 떠 있었다.
[근데 뜬금 없이 왜 보고 싶어.]
앞뒤 내용 다 거두절미하고 보낸 승현의 메세지에 지용도 내심 신경이 쓰이긴 했던 듯, 궁금증을 내포하고 있는 그의 톡에 승현이 다시금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 방금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생각 났어요.]
[어쩌다?]
[그냥, 밖에 벚꽃 많이 피었길래.]
[쓸데 없이 창 밖 구경하지 말고 공부나 하시죠.]
[하루 종일 공부하려니 머리에 쥐 나. 그러고 보니 고삼도 졸업 사진 찍는데.]
이번엔 언제 찍으려나요. 라고 승현이 이어 메세지를 보내려던 순간 지용이 한발 더 빠르게 답을 보냈다. [이번주 수요일.] …응? 이게 무슨 소리람. 갑자기 수요일은 왜?
[수요일? 그게 왜요.]
[너 졸업 사진 찍는 날.]
[그걸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내가 어떻게 알 거 같아?]
질문을 했더니 대답은 커녕 되물음이 돌아온다. 이 아저씨가 나랑 말장난 하자는 건 아니겠고. …그렇다면 설마.
[…설마.]
[설마가 사람잡지.]
[아저씨가 와요?]
[이해했으니까 이제 공부하렴.]
중학교 졸업 사진에 이어 고등학교 졸업 사진까지 아저씨라니, 이게 무슨 드라마 같은 일이야. 놀라운 것도 많았지만 무엇보다는 기쁜 일이었다. 요즘 잘 보지 못했던 아저씨를 볼 수 있어! 신이 난 승현이 대화창에 웃고 있는 이모티콘을 테러하듯 잔뜩 보내자 어이고, 그렇게 좋니? 라는 지용의 답이 돌아온다.
[당연히 좋죠! 나 예쁘게 찍어줘.]
[그거 알지?]
[뭐요?]
[본판 불변의 법칙.]
넌 본판이 못나서 예쁘게 안 돼. 단호박을 잔뜩 먹은 것 같은 지용의 말에 승현은 뚱하다 못해 삐쳐버릴 지경이 되었다. 이, 이 아저씨가 정말! 작게 씨근거리던 승현이 대화창을 꺼 버리곤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마침 쉬는 시간 종도 울렸겠다, 하는 마음에서였다. 수화음이 들린다 싶으냐 시간도 잠시, 곧 지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진짜, 진짜, 진짜 나빴어!!!"
아무런 일도 없단 듯한 지용의 어투에 승현은 그만 빽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 여파로 반 전체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 되었건만 여전히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승현은 눈치를 못챈 듯 해보였다. 은근 둔한 신경의 소유자인 승현이었다. 뭐, 승현이 그렇게나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당사자인 지용은 짧게 허, 웃더니 말을 이었다.
- 내가 틀린 말 했나 뭐.
"…좀 칭찬 해주면 어디가 덧나요?"
- 아무리 그래도 거짓말로 잘못된 착각을 하게 만들면 안되지.
아, 정말! 제 속을 살살 긁는 멘트를 지용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들으니 더 데미지 커진 듯한 느낌이었다. 전화 괜히 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말 없이 전화를 끊어 볼까…. 승현은 통화 종료 버튼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그래 봤자 다시 들리는 지용의 목소리에 다시 스피커를 반사적으로 귀에 가져다 대어 버렸지만.
- 못난아.
"…못난이 아니거든요."
- 됐고. 그럼 이렇게 하자.
"뭘요."
- 그거 바르고 와.
"그게 뭔데."
- BB 크림.
그거 바르면 그나마 잘 나올지도 모르지, 우리 못난이. 낄낄거리는 웃음 소리와 함께 들리는 목소리는 승현을 놀리려는 지용의 의도가 가득 묻어나 있었다. 그 사실에 다시금 밉다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가 '우리 못난이' 라는 말에 조개마냥 입을 꾹 다물어 버린 승현이었다. 지용이 자신을 부를 때 '우리' 라고 붙여 부르면 늘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 그 뒤에 어떤 호칭이 붙던 간에 우리, 라는 단어로 자신이 그에게 특별해지는 기분이랄까. 그 사실은 분명 지용도 알고 있을 터였다. …내가 아저씨 입에서 나오는 그 말 얼마나 좋아하는 줄 잘 알면서, 이럴 때 써먹어. 결국 승현은 반박을 포기하고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피부에 안 좋다고 바르지 말랬잖아요, 전에."
- 그때는 네가 어렸잖아.
"지금도 어리다면서요."
- 지금 쯤이면 피부는 다 컸어. 괜찮아.
"…그래서, 이젠 발라도 된다?"
바로 그거야. 라고 말하는 지용의 목소리는 흡사 헤메던 학생이 해답의 실마리를 찾았을 때의 선생님과 닮아 있었다. 그 어투가 더욱이 얄밉다. 결국 제대로 토라진 승현은 지용에게 아무런 대답도, 예고도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꾹 눌러 버렸다. 그리고는 지용에게 연락이 다시 오기 전에 화면이 바닥을 향하도록 뒤집어 책상 서랍으로 골인. 그런 후에도 한참 토라진 얼굴로 앉아 있던 승현이 문제집 위에 널부러져 있던 샤프를 집어 들었다. 아저씨는 잊어 버리고 공부나 해야지. 이번주 수요일에 오던 말던, 내가 알 게 뭐야.
그러면서도 수요일이 이틀 후라는 사실은 머리 속 잘 기억나는 명당 자리에 심어 둔 승현이었다. 덤으로, 수요일에 아저씨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도.
*
시간은 적당한 속도로 흘러갔고, 여유로이 수요일의 시작점까지 닿았다. 아이들 모두 평소보다 아주 조금 더 소란해졌을 뿐 별 다른 차이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승현은 달랐다. 제가 다니는 학교 내에 지용이 있다고 생각하니 괜시리 이것 저것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문득 눈이 간 동생의 BB 크림을 보면서 저걸 정말로 가져가 볼까 생각도 했었다. 그러다 얄미운 지용의 목소리가 또 한 번 생각이 나 그냥 등교해 버렸지만.
지금도 공부는 뒷전인 채 창문 유리를 거울 삼아 바라보면서 제 모습을 확인하려고 노력하는 승현이었으나 아무래도 투명한 유리창에는 제 모습이 제대로 비치기가 어려운 듯 해 보였다. 너무나 흐릿하게 비치는 인영에 결국 승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럴 바엔 차라리 화장실에 가는 게 낫겠어. 자습 시간이었기에 선생님에게 간단히 허락을 받고 교실을 나와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한적한 복도를 지나, 남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 승현이 세면대 앞으로 다가가 섰다. 그리곤 벽 한면을 커다랗게 차지하고 있는 거울로 제 상태를 확인하고 있던 중, 저 말고 거울에 다른 누군가가 비치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았건만. 화들짝 놀란 승현이 뒤를 홱 돌아보았다. 그러자 이게 웬걸, 지용이 제 뒤에 떡하니 서 있었다.
"…아저씨?"
"어이고, 수업 시간에 공부는 안하고 화장실로 거울을 보러 와?"
"…자습 시간이거든요."
"어쨌든 쉬는 시간은 아니잖아."
"여기 왜 있어요?"
"못난이, 말 돌리네?"
하여간 눈치는 빨라. 슬슬 잔소리를 쏟아낼 준비를 하는 듯한 목소리에 은근 슬쩍 화제 전환까지 해 보려고 했건만 보기 좋게 실패한 승현이었다. 거슬린다는 듯 눈썹 끝을 슬며시 올리는 지용의 시선을 슬며시 피하며 승현이 고개를 숙였다. 못난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투덜임을 웅얼웅얼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 예상치 못한 때였긴 했지만 그렇게나 고대하던 지용을 만나 잠시나마 기뻤는데, 아저씨는 저런 식이다. 우리 매번 연락만 주고 받다 얼굴보고 만난 건 한참 만인데. 승현의 표정이 주인이 놀아주지 않은 강아지마냥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 보던 지용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담겼다. 어쩌면 저렇게 속마음이 빤히 보이는지. 당장 내년이면 법적으론 성인인 녀석이지만, 속이 어리긴 참 어리다 싶었다. 성큼 녀석의 앞으로 걸어가 손으로 양 볼을 잡아 고개를 들게하니 놀란 듯 동그랗게 떠진 눈이 시야에 담겼다. 평소에도 제 성격마냥 순한 눈매이긴 하지만, 이렇게 보니 순딩이 강아지가 따로 없다. 비유하자면 말티즈려나. 자신을 바라보는 승현과 눈을 마주치고 지용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못난아, 이렇게 부르니 조개마냥 꾹 다물어진 입이 열릴 기미가 없다. 이번엔 승현아, 라고 부르니 그제서야 네, 라고 대답한다. 고집불통 같으니.
"좀 있으면 촬영 시작이야."
"……."
"미리 말하는데, 촬영 때 너무 빤히 쳐다보지 말고."
"…왜요."
"다른 애들이랑 너무 떠들지도 말고."
"그건 또 왜."
부루퉁한 입술, 삐딱한 말투. 온 몸으로 나 아직 기분 안 풀렸어요, 를 어필하는 승현의 태도에도 지용은 부러 눈치 못 챈 척 제 할 말만 이어갔다.
"말 안들으면,"
"…뭐."
"보정할 때 볼 꾹 눌러 버릴거야."
이렇게. 말을 마친 지용이 아직 떼지 않았던 손으로 양 볼을 꾹 눌러 버린다. 왜, 왜 이래요! 붕어처럼 삐죽 튀어나온 승현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지용은 낮게 큭큭거리며 웃어낼 뿐이었다. 이거 놔줘요! 싫은데. 칼같이 거절하며 한사코 볼을 붙잡고 있는 지용에 승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흘겨보았다. 눈 가늘게 뜨니까 더 못나졌네. 그럼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승현을 놀리는 지용이라니, 참 11살 차이가 무색하다 느껴질 광경이었다. 차라리 동급생이란 말이 어울릴 법 할 정도 였으니.
한참 승현을 놀려 먹던 지용이 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슬슬 준비하러 갈 시간이 되어 있었다. 뺨을 놓아줘야 겠지만, 이렇게 부루퉁한 얼굴이 시야 한 가득 담겨 있으니 바로 놓아주긴 아깝기도 하고. 요즘 장난 친 게 많다보니 제가 그냥 가버리면 단단히 토라질 게 뻔한 승현이기도 하고. 게다가 평생 남는 졸업 사진 촬영 날인데 이런 표정으로 사진을 남기게 할 수는 없지. 그리 생각을 마친 지용이 승현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주위를 한 번 휙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거 맞지? 역시나 이 화장실엔 둘 뿐인건지 잠잠한 주변에 됐다, 싶은 지용이 씩 웃으며 다시 승현을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치고, 삐죽 나온 입술도 한 번 더 보고. 그리고선 입술에다 쪽,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짧지도, 그리 길지도 않게 맞대고 있던 입술이 떼어지고 지용이 다시 승현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이런 기습 뽀뽀를 받을 걸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인지 승현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절로 웃음이 터진 지용이 승현의 볼을 놓아주고 머리를 가볍게 정리해 주었다.
"나 이제 가야해."
"…아저씨, 그러니까, 저기…."
"이따가 보자."
내가 한 말들은 꼭 지키고. 알았지? 당황한 탓에 말을 더듬거리는 승현을 잡아 끌어 화장실 문 앞까지 데리고 나와 놓아준 후 지용은 그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겨진 승현은 어느새 볼까지 발갛게 물들인 채로 지용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어느 학교나 학생들은 넘쳐나고, 그만큼 사진을 촬영하는 시간도 오래 걸린다. 대체 언제 끝나는 것인지. 두어 시간 전인 점심 시간에 쉰 이후로 도통 휴식이란 휴식을 가지지 못한 채 줄창 카메라 앞에 서 있던 지용은 서서히 한계에 다다르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두 반 남았다고 했던가. 막막한 심정으로 제 앞에 앉은 학생의 촬영을 마친 지용이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다음 번호를 불렀다. 23번. 그러자 잠시 후 누군가 촬영용 의자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제 번호가 호명되니 앉은 거겠지, 뭐. 어차피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그의 눈엔 그 애가 그 애로 보였기 떄문에 지용은 별다른 확인 없이 다시 촬영을 재개하려 렌즈에 눈을 가져가 대었다. 그리곤 셔터를 누르려던 순간, 지용은 손을 멈칫했다. 렌즈 너머로 비춰진 학생의 얼굴이 승현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지용이 셔터를 누르다 말고 렌즈에서 눈을 떼 저를 바라보자 승현이 작게 움찔했다.
"…왜, 왜 안 찍어요?"
"…학생 교복이 구겨졌어."
"네?"
지용의 말에 승현이 움찔하며 제 교복을 내려다 보니 교복 상의 앞자락에 조금 구김이 가 있다. 아차, 싶은 승현이 손으로 구겨진 곳을 탁탁 털어 펴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자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구김이 좀 덜해졌다. 이제 됐다. 다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려던 승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카메라 앞을 벗어나 제 앞에 서 있는 지용 탓이었다.
"구겨진 것도 그렇고,"
고개도 좀 기울어졌어. 그가 왜 가까이 다가 왔을까 싶은 승현의 속마음에 대답이라도 해주듯 말한 지용이 손수 승현의 고갤 세운다. 촬영 때문에 그런거구나. 난 또. 그가 하는 대로 고개를 순순히 움직이며 안도하는 승현이었다. 그래, 아저씨가 여기에서까지 무슨 짓을 할 리가 없지. 그럼에도 아까 전 짧은 입맞춤의 영향인 듯, 지용이 제 가까이에 있단 사실에 승현의 마음 속에는 묘한 두근거림이 일렁였다. 그런 류의 스킨쉽이 처음도 아니었건만, 어쩐 일인지 닿아왔던 그의 입술 감촉이 여전히 생생히 기억나 승현의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난 몰라. 지용이라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좀 나으련만, 고개를 바로 세워둔 지용은 야속하게도 여전히 승현의 바로 앞에 서 있다. 좀 가란 말이야, 아저씨. 승현이 안되겠다 싶어 작은 목소리로 사진이나 빨리 찍으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여기, 아직 구겨졌네."
지용이 손을 뻗어 승현의 옷을 툭툭 털어준다. 내가 다 털었는데. 제대로 안 털었나? 싶은 생각도 잠시, 승현은 무릎에 겹쳐 두었던 제 손 사이로 무언가가 끼워 넣어지는 감촉을 느꼈다. 거의 반사적으로 그것을 손에 쥐니, 그제서야 지용이 제게서 떨어져 카메라 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승현을 보면서 가볍게 윙크.
"이제 찍는다."
지용의 말 뒤에 바로 셔터음이 두세번 울리고, 촬영은 그렇게 끝이 났다. 24번. 제 다음 번호를 호명하는 지용의 목소리에 승현이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촬영이 끝난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앉은 후에야 꽉 쥐고 있었던 손을 펴 보니, 아까 낯선 감촉이 작은 쪽지임을 확인할 수 있는 승현이었다. 승현이 조그만 손으로 쪽지를 천천히 펴 본다. 익숙한 글씨체. 지용의 것이었다. 급하게 쓴 듯 휘갈긴 필체였지만 승현은 금방 내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청소 시간에 다시 여기로.]
*
쪽지에 써 있는 대로, 청소 시간이 되자 승현은 지용이 있던 곳으로 다시 찾아왔다. 그런데 어째 지용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승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저씨-?"
제 부름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자 승현이 미간을 살짝 찡그린다. 오라고 해놓곤, 어디 간 거야. 지금 나 놀리는 건가, 생각하던 중 제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웅웅 진동했다. 승현이 꺼내 확인해보니, 지용에게서 온 메세지였다. [벚꽃은 참 예쁘네?] 라는 내용과, 벚나무를 찍은 사진이 첨부 파일로 담긴. 그 벚나무가 무척 익숙하단 사실을 깨달은 승현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승현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제가 늘 창 밖으로 바라보던 벚나무가 있는 곳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뒷모습이 승현의 눈에 들어왔다. 벚꽃을 바라보는 듯, 하늘을 조금 올려다 보고 있는 뒷모습. 승현이 그의 뒤로 가까이 다가갔다.
"…아까 거기로 나오라더니 왜 여기 있어요."
승현의 목소리에 그가 뒤를 돌아본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지용이었다. 제 뒤에 서 있는 승현을 바라본 지용이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띄운다.
"그냥."
"그냥은 무슨."
"그래. 사실은,"
"……."
"너랑 벚꽃 구경 좀 하려고."
아,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부실한가. 제 볼을 긁적이며 말하는 지용을 승현은 말 없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봄바람에 꽃잎이 하나 둘 천천히 낙화한다. 그 꽃잎 사이로 지용의 목소리가 또 이어진다.
"이번에 둘다 바빠서 못 갔잖아. 너 가고 싶었을 거 아냐."
"…알고 있었어요?"
나 아쉬워한 거. 힘겹게 떼어진 승현의 입술 새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지용이 고개를 끄덕인다. 뻔하지 뭐. 내가 널 모를리가 있어.
"…뭐, 늘 보던 벚나무라 별 감흥 없을 수도 있지만."
"……."
"올해는 이걸로 넘어가자, 이승현. 내년에 제대로 가고."
"……."
"알았지?"
"…고마워요."
나 신경써줘서, 나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아저씨. 승현이 활짝 웃음 지으며 지용을 바라보았다. 일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저를 신경 써 준 지용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그의 말대로 늘 보던 벚꽃이라고 할지라도, 승현은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기쁘게 웃는 승현의 모습에 지용도 만족스런 미소를 띄웠다. 아무리 괴롭힐 때 반응이 재밌다고 할 지라도, 녀석은 웃는 모습이 제일 보기 좋았다.
"공부 열심히 해."
"치. 또 그 소리에요?"
"열심히 해서 대학 꼭 가라고."
"네, 네."
"그래야 실컷 놀지."
알았네요, 알았어. 또 시작되는 듯한 지용의 잔소리였지만 승현은 평소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짓기는 커녕 싱글거리는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대답했다. 온 얼굴로 기분 좋음을 드러내는 승현에 지용도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지용의 시선이 문득 하늘을 향했다. 맑은 날씨 탓인지 하늘이 참으로 파랗다. 눈동자에 온통 하늘을 담아내던 지용이 천천히 입을 떼어냈다.
"내가 카메라를 잡기 시작한 이유는 딱 하나였어. 아버지가 사진 작가였거든.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으시는, 그런."
"……."
"난 아버지를 닮고 싶었어."
"……."
"내 생각엔, 나이 들면 한국을 벗어나기 힘들 거 같아서. 늙기 전에 여행을 떠나야 할 거 같아."
사십 이전엔 갈거야. 그렇게 말하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던 지용이 다시금 승현을 바라보았다. 제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승현의 시선과 제 시선이 얽히자, 지용이 부드럽게 웃었다.
"대학도 가고, 군대도 가고. 총 몇 년이람. 오래 걸리겠다."
"……."
"기다릴게."
"…네?"
"같이 떠나자."
너만 괜찮다면. 같이 여행 떠나자고, 승현아. 조근한 지용의 목소리가 떨어지는 벚꽃잎을 타고 승현에게 닿아왔다. 스쳐 지나가는 꽃잎들로 간질한 볼마냥 가슴 속까지 간질거린다. 그 간지러움들이 싫진 않다. 오히려 벅찬 기분이다. 기다려 준다는 지용의 목소리가, 제게 기쁘게 닿아온다. 승현아, 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제 안에서 깊게 뿌리내리고 자라 꽃망울을 터트린다. 그 꽃 향기가 그저 좋아서, 승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기된 볼을 한 채로 고개를 위 아래로 주억였다. 제 벅찬 마음을 그가 잘 알 수 있도록. 그렇게.
열 아홉, 봄날의 교정. 벚나무 앞 그와 나.
승현은 이 모습을 쉬이 잊지 못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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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님 합작 공지가 뜬 순간 본 주제에 눈이 갔습니다. 불과 몇 일전에 제가 트위터에서 혼자 몇 자 적어내려갔던 썰에 맞겠다 싶었거든요. 주제 이름처럼 두근거리는 아고물을 쓰고 싶었고, 게다가 요즘 아고물에 빠져있는 탓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 덕에 오랜만에 정말 글다운 글을 쓸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정말 펑크를 안 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ㅠㅠ 이런 좋은 합작 주최해주신 숫자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어주실 분들도 감사드려요! 미숙한 글이겠지만 예쁘게 읽어주세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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